생명의 은인과 대동강 치안대장

부엌문을 열고 그 처녀에게 솔직하게 말을 하였다. 그곳은 인민군의 점령 하에 있는 지역이니 인민군에 관련된 주민이라면 영락없이 붙들려 죽을 운명인데도, 어린애같이 순진하게 “나는 서울에서 온 대학생인데 인민군에게 붙들려 감옥살이를 하다가 500명을 죽이는 서포뒷동산의 총살 집행장에서 인민군에게 총살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살려 주셔서 살아났습니다. 저를 살려주시면 생명의 은인으로 알고 그 은혜는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하였다.

  “살려주세요. 총살을 당했지만 하나님께서 살려 주셔서…”그 처녀는 이사람을 보고 기겁을 하고 놀랬다. 이사람의 옷과 얼굴은 다른 시체에서 흘러내린 피로 온통 얼룩져 있었다. 또 오랫동안 옥중생활로 모발이 많이 길어 있었던 고로 누구든지 처음 보면 놀라지 않을 수 없는 모습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이 처녀는 인민군과 관련이 없는 교회목사의 외동 따님으로 기독교 신자였다.

  그 처녀에게는 오빠가 셋 있었는데 큰 오빠와 셋째 오빠는 목사인 아버지와 함께 산 속으로 들어가 지하 반공 운동을 하고 있었다. 이들은 유엔군 비행기가 공습을 오면 근처 인민군의 무기고와 군수물자 창고, 군부대 위치 등을 무전으로 알려주는 일도 하였다. 그런데 둘째 오빠는 노동당 중앙위원으로 김일성의 총애를 받는 진짜 빨갱이였다. 더욱이 그 둘째 오빠가 조금 있으면 집에 온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들으니 식은땀이 흐르며 입 안이 말라왔다. 조금 전까지 빨갱이들에게 붙잡혀 사형집행을 당하고 왔는데 또 빨갱이에게 잡힌다면 그야말로 끝장이었다. 그래서 그 처녀(이양숙)가 저녁식사라며 가져 온 삶은 고구마 두 쪽이 목에 넘어가지 않았다. 그래서 이사람은 “성의는 고맙지만 지금은 도저히 먹을 수 없으니 빨리 숨겨주세요.” 하고 애원하였다.이양숙은 불안해하는 이사람을 데리고 마당 끝으로 갔다.

  거기에는 댑싸리 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었는데 그 중 가장 큰 것을 당기니 그 속에 굴이 있었다. 굴 속에는 요와 이불, 등잔불, 책상 등이 있었고 볼셰비키 당사(黨史) 등 공산 이념서적들도 많이 있었다. 공산치하에서 이런 날이 올 것을 예상하고 이 집 식구들이 미리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 이사람은 굴 속에 있는 동안 공산 이념 서적들을 모조리 독파한 후 공산주의는 얼마 못 갈 것을 직감하였다.

  부유한 사람의 재산을 빼앗아 못 가진 사람들에게 공짜로 나눠주니 처음에는 공산주의를 좋아할지 모르지만 노력 없이 얻은 것은 소중히 간직하지도 못할 뿐더러 밤잠 못 자고 땀 흘려 노력해서 모은 재산을 빼앗기니 능력 있고 재주 있는 사람들도 구태여 힘써 일할 필요성을 못 느껴 일을 게을리 하게 되므로 이런 사회는 날이 갈수록 피폐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그 이후 이사람은 기회 있을 때마다 공산주의의 허구성과 모순을 논리적으로 설파하여 많은 사람들을 민주진영으로 전향시켰다.이사람이 굴 안에서 한 달 가량 생활하는 동안 이양숙이란 처녀는 매일 밤 12시만 되면 도시락을 두 개씩 갖다 주었다. 그녀는 이사람이 서울 사람이라 고구마를 못 먹는 줄 알고 비밀리에 주민들에게 연락하여 자신들도 잘 먹지 못하는 비싼 쌀을 거둬 쌀밥을 해오는 것이었다.

6.25 전쟁시 유엔군에 잡힌 포로들

  그러면서 그날 그날의 전황을 쪽지에 적어 같이 보내왔다. 그래서 이사람은 굴 속에 있으면서도 9·15 인천 상륙과 9·28 서울 수복 그리고 평양 탈환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평양 탈환 소식을 전해 듣고 난 다음날 “동지! 조동지! 해방됐시요! 나오시라요.” 하며 부르기에 나가보니 인민군이 개미떼같이 새까맣게 북쪽으로 도망가고 있었다. 평양시와 대동군 일대의 주민들은 집집마다 태극기를 내걸고 국군이 입성하면 환호성을 지르며, 만세를 외치면서 좋아하고 있었던 것이다.

“동지! 조동지! 해방됐시요”한 달 만에 굴에서 나오니 모발은 더욱 길어졌고 햇빛을 보지 못하여 피부는 하얗게 되어 20세의 젊은 청년이 30대로 보였다. 구레나룻 수염이 무성하게 자란 것도 한 원인이 되었다.대동군내에 있는 젊은 반공 청년들이 치안대를 조직하고는 이사람에게 대장을 하라 하였다.

  극구 사양하였으나  조동지가 총살 집행까지 당했던 철저한 반공주의자니까 빨갱이 때려잡는 데는 적합하다 하여 억지로 시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사람은 반공청년 30여 명을 데리고 대동군 치안대를 이끌고 인민군과 좌익에 물든 청년들을 체포하여 감옥에 집어넣는 활동을 하였다. 그런데 치안대원들은 인민군을 포로로 잡기만 하면 죽였다.

   “성경에도 ‘살인하지 말라’고 했고, 또 우리 민족이 일본에게 36년 간 식민지 생활하다가 이제 해방을 맞아 독립국가를 세운 지 몇 년이나 되었느냐? 얼마 안 되는 동안에 동족상잔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는 먼 훗날 치욕의 역사가 될 것이므로 몇몇 위정자들에 의해 우리가 꼭두각시 노릇을 할 수는 없으니 우리 국민들만이라도 서로 죽이는 일은 삼가하자. 사상이 잘못되어서 그런 것은 사상만 바로 잡으면 되는 것이 아니냐.”고  치안대 젊은 청년들을 모아 놓고 눈물을 흘리며 웅변을 하였다.

  이에 3분의 2 정도의 대원은 수긍을 하며 호응하는데 나머지 대원들은 이에 응하지 않았다. 결국 이 안(案)은 다수결로 통과되었는데 삼분의 일 정도의 대원들은 “이 빨갱이 놈은 악질 중의 악질로서 우리 부모를 죽이고 형제 자매를 무참히 학살하고 죽였기에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고 하며 잡기만 하면 죽이려고 했다.

  그때마다 말려서 죽음을 모면하고 형무소로 넘겨진 사람이 많이 있었다. 치안대장 당시 한번은 밤 12시쯤 되어 어떤 사람으로부터 신고가 들어 왔는데 “저 산 너머 독립가옥 두 채에 인민군 군관단으로 조직된 특공대 2백 명이 대동군 치안대를 해치려는 목적으로 한 채에 100명씩 나뉘어 현재 식사 중에 있다.”는 것이었다.*

하나님이 이기셨나이다 / 윤봉수 승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