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산문

민족의 아픔을 느끼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분단의 철조망에 희망이 찢긴 사람들의 눈물을 닦아주려는 노력은 문학인의 몫이다.

문학은 국적이 불분명한 이론이 아니라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노래가 되어야 한다. 골리앗 같이 거대한 분단 실체에 당당하게 맞서는 다윗의 용기가 문학인에게 필요하다

나는 민간 차원에서 교류가 이루어진다고 통일에 대한 기대감을 갖고 있지 않다. 아직도 이 땅에는 오천년 민족 공동체를 잔인하게 난도질을 한 외세들이 제왕처럼 군림하고 있으며 분단이라는 민족 슬픔에 기생하는 매판 세력들이 득세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바라는 통일은 신기루에 불과하다.

북한 체제 또한 민족의 아픔을 극복하는 통일에는 관심이 없는 것 같다. 군사적 긴장과 남한 사람들의 섣부른 통일 환상을 부추기면서 더 많은 지원을 얻기 위한 외화벌이 사업으로 이용하고 있다. 민족의 미래를 스스로 결정할 힘과 열정도 없으면서 분단극복 외침은 공염불 헛구호이며 통일 행사도 헛제사일 뿐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평화의 탈을 쓰고 한반도 분단의 골을 깊게 하는 세력들을 똑바로 보는 일이다. 민족 현실을 외면하고 거창하게 세계화를 떠들기 전에 분단의 실체에 대해 고뇌하고 후손들에게 똑바로 가르쳐야 한다.

적어도 한반도가 일본의 식민지가 되기 전인 1905년 7월 ‘미국은 필리핀, 일본은 대한제국에서의 독점권익을 인정하는 대가를 주고받은’ 카쓰라 태프트 밀약에 대해 규명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일본이 항복하자마자 청천벽력과도 같은 38선을 그어놓고 분단을 만든 책임도 따져야 한다. 이 지구상에는 반만년 역사와 문화를 자랑하는 민족을 제멋대로 둘로 쪼갤 권리를 가진 나라는 없다. 반인륜적인 범죄를 저지른 세력들은 입만 열면 평화나 자유 따위를 나불거린다. 지구촌의 평화 사도인 것처럼 떠벌리고 있다. 평화는 벗겨낸 인디언 머리가죽에 쓰는 단어가 아니고 분단 철조망을 쳐 놓고 나발을 부는 것이 자유가 아니다.

미군정 이후 극히 친미적인 사람을 대통령으로 앉혀 놓고 친일 범죄자들에게 전부 면죄부를 씌워 주면서 자신들의 충직한 개로 만드는 것을 민주주의라 하면 우리 민족의 앞날에는 이미 장송곡이 울리고 조종(弔鐘)이 장단을 치고 있었던 셈이다. 이후 일어난 우리나라의 개차반 정치는 외세에 종속된 세력들이 번영의 허울 내세우고 벌인 자기들만의 밥그릇 싸움판이었다. 그들의 통치 이념은 안보였다. 천상천하 안보 독존 시대에는 민주주의 최고 가치인 법은 시녀로 전락했다. 분단 극복에 대한 논의는 빨갱이로 몰리는 설화(舌禍)였고 집안을 패가망신의 지름길로 만들어 통일 열망에 재갈을 물렸다. 정통성이 없는 정권은 자리보전을 위해 집착했고 안보와 무장평화는 바로 현대판 공포정치였다. 결국 민족의 통일 염원은 짓밟혔으며 뒷전에서 무기를 파는 한반도의 기둥서방, 외세들 배나 채워주고 있었다. 어쩌다 요란하게 등장하는 이벤트성 통일 선언 행사는 국민에게 퇴화된 통일 꿈을 더듬어 보는 착각을 만들었지만 언제나 희망사항으로 남았다.

우리들의 분단의식은 이상하리 만큼 무디기만 하다. 몇 년 전에 9.11 테러가 일어났을 때 우리 국민은 테러를 당한 심정으로 분노를 하고 매스컴에서는 거의 광적인 오열을 했다. 그렇다면 빌딩 2개가 무너진 것과 60년 동안 분단 철조망이 이 땅에 뿌리내린 것과 어느 것이 더 고통인지 생각해 봐야 한다. 한반도에 가한 분단 철조망은 건물이 무너진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7천만에게 저지른 철조망 테러며 대 재앙이다. 적어도 일본 식민지 시대에는 한반도 곳곳을 다닐 수 있는 자유는 있었다. 해방 이후 분단은 우리들 발길을 모조리 묶어 놓고 이념의 편식을 강요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8월 15일 광복절이 아니라 국치일 분단절이라는 자각이 통일의 시작이라는 생각이다.

이런 폭력 앞에 분노감을 느끼지 못하는 우리 민족의 역사시계는 60년 전에 멈추어 있다. 동서 냉전 이념이 이미 지구촌에서 고린내 나는 낡은 것이 된지 오래지만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로 남은 우리는 선진국민이 아니다.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이념이 신앙인 미개인이다. 겉으로 드러난 경제지표로는 선진국 수준이라고 자랑하지만 세계 역사상 지금 분단의 고통을 겪고 있는 나라가 없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가장 지적 능력이 떨어지는 족속인 것이 분명하다. 단적인 예로 탱크로 우리의 꽃다운 여중생 2명을 짓이겨 놓고서 무죄 판결을 내리는 철면피들에게 우리는 어떻게 했는지 생각해 보면 그 해답은 분명하다. 민족의 아픔을 공감하지 못하면서 통일을 외치는 것은 무책임하다. 외세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 민족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겠다는 자존심 없이 떠드는 수식어에 불과하다.

이 땅에 문학은 민족의 아픔을 느끼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분단의 철조망에 희망이 찢긴 사람들의 눈물을 닦아주려는 노력은 문학인의 몫이다. 문학은 국적이 불분명한 이론이 아니라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노래가 되어야 한다. 골리앗 같이 거대한 분단 실체에 당당하게 맞서는 다윗의 용기가 문학인에게 필요하다. 작은 노래 가락이라도 우리 민족이 입을 모아 가슴으로 합창을 한다면 바로 그것이 하늘의 소리가 될 것이다. 외세를 몰아내는 만파식적(萬波息笛)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이런 생각을 하는 순간에도 용화동 뒷산에 떨어지는 폿소리가 앙칼지게 하늘을 흔든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포사격 소리에 흔들리는 산에서는 향기로운 꽃이 피고 탱크들이 훈련하는 계곡에서는 결코 꺾이지 않는 풀들이 뿌리를 내리고 있을 것이다. 그 아름다운 생명력에 어울리는 글을 쓰기 위해 노력을 할 것이다.*

정춘근 시인의 약력

1960년 강원도 철원에서 출생했으며 1999년 <실천문학> 봄호에 '지뢰꽃'외 3편을 발표하면서 문단활동을 시작했다. 2001년 첫 시집 '지뢰꽃'(문화발전소)을 출간했으며 금년에 둘째 시집 '수류탄 고기잡이'(작가마을)를 출간했다. 현재는 글짓기를 지도하면서 민족문학작가회의 강원지부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E-mail : jck452@hanmail.net)